왜관에서 서대구까지, 고개 너머 봄길을 걷다 - 15일차

황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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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룡대교)

2025년 4월 21일 월요일 흐리다 맑아지는 하늘처럼, 오늘 걷는 길에도 변주가 있었다. 15일째 맞는 아침. 왜관역에서 시작해 서대구역까지, 약 33km 거리다. 네이버 지도는 4번 국도를  따라 신동역을 거치는 코스를 안내했지만, 나는 낙동강 자전거길과 금호강변을 따라 마천산을 넘는 경로를 택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6시간 40여 분. 길은 다소 험하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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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오전 8시 5분. 걸음을 떼자마자 휴대폰에서 흐르는 이탈리아 영화 La Strada의 주제곡이 귓가를 맴돌았다. 떠돌이 곡예사의 음악처럼, 오늘도 나는 길 위를 유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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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자전거길은 걷기에 더없이 쾌적했다. 어딘가에 머무는 여행이 아닌, 어딘가로 계속 나아가는 여행자에게 이 강변 길은 묘한 위로를 건넨다. 길가에 세워진 ‘왜관나루터’ 비석은 과거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오전 9시 무렵, 밭에서 일하시던 어르신과 눈이 마주쳤다. 참깨를 심는 중이라고 했다. 전용 농기구로 비닐을 찌르면 구멍이 생기고, 씨앗이 알아서 들어가는 구조다. 농기구는 달라졌지만, 먹고 사는 마음만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674de5d267327.jpg4ed49f38d634f.jpg

걷기 좋은 날씨였다. 구름이 해를 가려 선글라스도 선크림도 필요 없었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떼, 넓은 논에 물대는 수로 소리, 논 사이 길을 덮고 있는 낯선 커다란 담요 같은 물건들. 알고 보니 벼 모종을 보호하는 덮개란다. 농촌의 풍경은 나날이 달라진다.

‘달성군 하빈면’이라는 표지판을 지나니 낯익은 단어가 보인다. ‘소 힘겨루기 대회’. 청도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소싸움이 이곳에서도 열린다. 싸움이 아닌 ‘힘겨루기’라니, 어쩐지 고운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264f348c0538d.jpg

그리고 마천산. 이름만큼 위풍당당한 산은 아니었지만, 차들이 쌩쌩 달리는 왕복 2차선 도로를 걷는 일은 여전히 아찔하다. 고갯마루 정상에는 ‘감사비’가 세워져 있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이 길을 한나절 걸어 넘어야 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1994년에 세운 비석이란다. 옛 고생을 잊지 말자는 뜻일까.9e9077689327e.jpg

산을 넘자 ‘열녀 정각’이 길가에 나타났다. 18세에 약혼자를 잃고, 굶어 죽은 여인의 절개를 기려 조선 성종 때 정려를 내렸고, 정조 때 정각이 세워졌다는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이 전해지는 듯해 걸음을 멈췄다.234c83fd205e9.jpg

고개를 다 내려오니 금호강이 보인다. 강가에서 낯선 청년이 걸어온다. 덴마크에서 왔단다. 21살, 나처럼 서울에서 부산까지 걷고 있다며 미소 짓는다. 텐트에서 자고, 편의점 김밥이 맛있다고 한다. 강한 체력, 낯선 땅에서 걷는 용기. 젊음이란 무엇인가, 부러움 반 감탄 반의 눈빛을 보냈다. 아쉽게도 그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함께 사진을 찍고 각자의 길로 나아갔다.cfc41a0b666e3.jpg

오후 3시부터는 금호강을 따라 걸었다. 억새 군락지 대신 아파트 숲이 자리 잡았고, 안내판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조금은 아쉽다. 오후 5시 50분, 서대구역에 도착해 사진 한 장 남기며 오늘을 마무리한다.

오늘 걸음 수 43,227보, 거리 33.12km. 절뚝이는 발바닥은 여전히 아프지만, 내 마음은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만하다. 오늘도, 감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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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백배 황성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