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 따라, 마음 따라 - 5일차

황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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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에서 전동까지 38km의 순례

아침 9시 20분, 천안역 플랫폼에 섰다. 천안은 이제 수도권 전철의 종점이자, 느리게 가는 무궁화호의 출발점이다. 기차는 천안을 지나 전의역을 향해 남쪽으로 향한다. 오늘의 목표는 우선 전의역, 여유가 있다면 조치원까지. 하지만 길 위의 하루는 언제나 계획과 다르게 흘러간다.

전날 자전거 도로 위를 걷던 상쾌한 기억이 떠올라 오늘도 혹시나 싶어 찾아보았지만, 전의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도로는 방향도 다르고 공사 구간으로 막혀 있었다. 길은 다시 아스팔트 위였다.

오전 10시 40분, 길가에 ‘천안삼거리’ 표지석이 나타났다.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 표지석 옆에는 6·25 전쟁 당시 7.8 전투에 관한 안내문과 미군 마틴 대령의 이야기가 함께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다. 왜 천안에 이 장군의 동상이 있을까 했더니, 이곳이 바로 그가 태어난 고장이었다.

"나라를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신호등 앞에서 정지한 사람들의 정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나도 조용히 되물었다.

오후 1시 35분, 소정리역 도착. 1905년에 문을 연 역사 깊은 역이지만 지금은 폐역이다. 사람도, 기차도 없는 고요한 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쳐 사진 한 장 남겼다. 옛 역의 쓸쓸함이 묘하게 가슴에 남는다.

오후 2시.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꽃 아래 철길이 펼쳐졌다. 그림 같은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기차가 지나가면 멋진 사진이 될 텐데’ 싶어 한참을 기다렸지만, 기차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뜨거운 햇볕 아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지나가는 열차를 포착했다.

함께 사진 이야기를 나눈 동작팡팡 대표님이 떠올랐다. “좋은 사진이란 무엇입니까?”라는 내 질문에, 사진을 직업 삼아 수십 년 살아오신 그가 답했다. “찍은 사람 마음에 드는 사진이 가장 좋은 사진입니다.” 그렇다. 만족은 외부가 아닌 내 안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오후 3시, 세종시 진입을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며 길은 다시 바뀌었다. 소정리역은 행정구역상 세종특별자치시에 속해 있지만, 이후 길은 다시 천안으로 이어졌다. 두 도시 사이를 오가며 걷는 여정은 국경을 넘나드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오후 4시 30분, 드디어 전의역 도착.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고, 예상보다 훨씬 먼 거리였다. 역 광장에서 다시 현수막을 펼쳤다. 근처 전통 찻집에 들어가 시원한 매실차 한 잔으로 숨을 돌렸다.

 지도앱을 켜보니 전동역 근처에 숙소가 보인다. 10km 거리. 자전거 도로를 따라 이어진다지만, 실제 길은 정비가 덜 된 마을길 수준이었다. 계속 앱을 보며 길을 확인해야 했고, 가끔은 되돌아가기도 했다.

오후 6시 50분. 마침내 전동역 도착. 근처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먹고 숙소에 들어왔다. 오늘 하루 동안 걷는 데 사용한 걸음 수는 49,918보, 거리로는 38.33km.

천안에서 시작된 오늘의 길은 이제 본격적인 기찻길 여정이었다. 시내를 벗어나 마을과 철길을 따라 걷는 길. 확실히 수도권 전철 구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편한 길 대신 작은 시골길을 선택했고, 그만큼 손으로 길을 짜가듯 걸어야 했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한다. 비가 오면 잠시 쉬어가야겠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만의 발자국이 기찻길을 따라 또렷이 새겨진 하루였다.


용기백배 황성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