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4월 23일 수요일 비가 그쳤다. 창밖은 맑고, 일기예보는 당분간 비 걱정 없단다. 하루 쉬었더니 몸은 가볍고 마음은 가뿐하다. 서대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이유 없는 흥이 실린다. 좋아서 하는 일,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9시 50분, 서대구역에서 출발 인증샷을 남기고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는 대구역, 동대구역을 지나 경산역까지. 네이버 지도는 약 22km 거리라 알려줬지만 시내 구간이라 인도가 잘 정비돼 있을 터, 늦은 출발도 걱정되지 않았다.

걷다 보니 눈에 띈 건 길모퉁이마다 둘러앉은 노인들이다.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조용한 아침을 살아간다. 노인복지관 앞 '피노키오의 생각'이라는 조형물 앞에 멈춰섰다. '행복한 노인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데, 설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스쳤다. "행복한 노인이라…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대구에 들어선 김에 김광석의 노래를 찾았다. '거리에서',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그의 목소리는 지금도 거리 위를 유영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라는 노랫말을 “퇴직 후의 생이여”로 고쳐 부르며 묘한 울림을 느꼈다.
11시 30분, 국채보상운동기념비 앞에 섰다. 1907년, 나라의 빚을 국민이 갚자며 시작된 대구의 자발적 운동. 그 곁엔 '대구콘서트하우스'의 근사한 외관이 자리해 있고, '근대골목 투어' 안내판도 보인다. 역사와 현재가 한 데 얽힌 공간이다.
11시 40분, 대구역에 도착했다. 예전엔 낡고 좁던 곳이 지금은 롯데백화점과 함께 우뚝 섰다. 점심은 운명처럼 '생대구탕'. ‘대구에 왔으니 대구탕’이라는 단순한 논리지만, 그 따뜻한 국물은 길 위에서 마주한 호사였다.
걷다 보니 '사거리' 대신 '네거리'라는 표기가 낯설다. 삼거리는 '셋거리', 오거리는 '다섯거리'일까?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파티마삼거리’와 ‘큰고개오거리’를 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1시 30분, 동대구역에 닿았다. 예전의 시외버스터미널 자리는 대형 복합환승센터로 탈바꿈했고, 신세계백화점과 지하철역까지 하나로 엮인 구조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도 문득 떠오른다. 2003년의 비극, 192명이 숨졌던 그날의 기억. 지하철도, 세월호도 더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광장은 ‘박정희 광장’으로 조성돼 있었다. 동상 아래 적힌 생몰 연도는 1917~1979, 그의 63년 생애를 짧은 숫자가 대신한다. 그 앞에서 문득 세월의 무게가 다가온다.
경산역으로 가는 길엔 대구구치소가 보인다. 입구 앞 '바르게 살자'라는 표석은 구치소 앞이라 더욱 묘한 울림을 준다. 붉게 핀 철쭉이 눈길을 끌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남겼다.
달구벌대로. 대구의 중심 도로는 편도 5차선, 왕복 10차선의 위용을 자랑한다. 잘 정비된 인도, 줄지어선 아파트,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 '야구전설로'라는 표지판엔 유쾌한 웃음이 났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걸 보니, 오늘도 경기가 열리나 보다.
오후 6시, 드디어 경산역 도착. 경북 경산시에 속한 이곳은, 오늘 내가 대구광역시를 지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앱에 찍힌 오늘의 걸음 수는 37,462보. 이동 거리 28.75km. 묵묵히, 하지만 깊게 걸어온 하루였다.
오늘도 세상은 시끄러웠다. 거리마다 정치 현수막이 펄럭이고, 내 휴대폰에도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그저 길을 걸었다. 나의 시간 속에서, 나의 속도로. 이제 다시 시작이다. 퇴직 후의 생이여.

용기백배 황성국
2025년 4월 23일 수요일 비가 그쳤다. 창밖은 맑고, 일기예보는 당분간 비 걱정 없단다. 하루 쉬었더니 몸은 가볍고 마음은 가뿐하다. 서대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이유 없는 흥이 실린다. 좋아서 하는 일,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9시 50분, 서대구역에서 출발 인증샷을 남기고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는 대구역, 동대구역을 지나 경산역까지. 네이버 지도는 약 22km 거리라 알려줬지만 시내 구간이라 인도가 잘 정비돼 있을 터, 늦은 출발도 걱정되지 않았다.
걷다 보니 눈에 띈 건 길모퉁이마다 둘러앉은 노인들이다.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조용한 아침을 살아간다. 노인복지관 앞 '피노키오의 생각'이라는 조형물 앞에 멈춰섰다. '행복한 노인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데, 설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스쳤다. "행복한 노인이라…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대구에 들어선 김에 김광석의 노래를 찾았다. '거리에서',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그의 목소리는 지금도 거리 위를 유영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라는 노랫말을 “퇴직 후의 생이여”로 고쳐 부르며 묘한 울림을 느꼈다.
11시 30분, 국채보상운동기념비 앞에 섰다. 1907년, 나라의 빚을 국민이 갚자며 시작된 대구의 자발적 운동. 그 곁엔 '대구콘서트하우스'의 근사한 외관이 자리해 있고, '근대골목 투어' 안내판도 보인다. 역사와 현재가 한 데 얽힌 공간이다.
11시 40분, 대구역에 도착했다. 예전엔 낡고 좁던 곳이 지금은 롯데백화점과 함께 우뚝 섰다. 점심은 운명처럼 '생대구탕'. ‘대구에 왔으니 대구탕’이라는 단순한 논리지만, 그 따뜻한 국물은 길 위에서 마주한 호사였다.
걷다 보니 '사거리' 대신 '네거리'라는 표기가 낯설다. 삼거리는 '셋거리', 오거리는 '다섯거리'일까?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가 ‘파티마삼거리’와 ‘큰고개오거리’를 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1시 30분, 동대구역에 닿았다. 예전의 시외버스터미널 자리는 대형 복합환승센터로 탈바꿈했고, 신세계백화점과 지하철역까지 하나로 엮인 구조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도 문득 떠오른다. 2003년의 비극, 192명이 숨졌던 그날의 기억. 지하철도, 세월호도 더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광장은 ‘박정희 광장’으로 조성돼 있었다. 동상 아래 적힌 생몰 연도는 1917~1979, 그의 63년 생애를 짧은 숫자가 대신한다. 그 앞에서 문득 세월의 무게가 다가온다.
경산역으로 가는 길엔 대구구치소가 보인다. 입구 앞 '바르게 살자'라는 표석은 구치소 앞이라 더욱 묘한 울림을 준다. 붉게 핀 철쭉이 눈길을 끌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남겼다.
달구벌대로. 대구의 중심 도로는 편도 5차선, 왕복 10차선의 위용을 자랑한다. 잘 정비된 인도, 줄지어선 아파트,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 '야구전설로'라는 표지판엔 유쾌한 웃음이 났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걸 보니, 오늘도 경기가 열리나 보다.
오후 6시, 드디어 경산역 도착. 경북 경산시에 속한 이곳은, 오늘 내가 대구광역시를 지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앱에 찍힌 오늘의 걸음 수는 37,462보. 이동 거리 28.75km. 묵묵히, 하지만 깊게 걸어온 하루였다.
오늘도 세상은 시끄러웠다. 거리마다 정치 현수막이 펄럭이고, 내 휴대폰에도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그저 길을 걸었다. 나의 시간 속에서, 나의 속도로. 이제 다시 시작이다. 퇴직 후의 생이여.
용기백배 황성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