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문화답사에 나선 국립민속박물관 전통문화지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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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떨어지던 2025년 6월 16일 이른 시각, 국립민속박물관 소속 전통문화지도사 73명은 충청남도 예산으로 출발했다. 오늘 답사에 나선 이들은 국립민속박물관의 소정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자격검정을 통해 전통문화지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시민들이다. 오전 일곱 시 삼십 분에 국립민속박물관 앞에서 출발한 이날의 문화답사는 충남 예산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화유적 탐방을 목적으로, (주)여행엽서 임찬웅 대표의 해설로 진행되었다.

 

충청남도 중서부에 위치한 예산군의 동쪽은 공주시이며 서쪽은 서산시, 남쪽은 홍성군과 청양군 그리고 북쪽은 당진시와 아산시를 접하고 있다. 또한 동쪽에는 차령산맥, 서쪽에는 가야산맥이 남서쪽으로 연결되며 이 사이를 삽교천과 무한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넓고 기름진 예당평야가 예산군의 중앙부를 형성한다. 온양, 당진, 홍성, 공주 등 네 갈래의 교통로가 예산읍으로부터 이어지며 충청남도 북서부지역 도로교통의 중심이자 분기점 역할을 한다. 역사유적뿐만 아니라 덕산온천과 사과도 유명하며 신양팔경 등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많아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 윤봉길 의사 등을 배출한 곳이며 서로 우애를 다툰 ‘의좋은 형제’ 이성만, 이순 형제의 고장이기도 하다.

 

일행이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수덕사’로 덕숭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며 우리나라 불교계 8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는 조계종 제 7교구 본사이다.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 담징이 그린 대웅전 벽화가 유명하다. 지금은 폐사된 보원사나 가야사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작은 사찰이었던 수덕사는 1937년 대웅전을 해체 수리할 때 1308년에 건축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때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설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하고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해진다. 만공 스님이 1938년 전라북도 남원 ‘귀정사’에서 옮겨다 모신 목조불상 안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수덕사 대웅전 삼세불(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 초 경허 스님이 수덕사에 머물며 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그의 제자 만공 스님의 중창으로 선종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은 한국불교가 일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수덕사의 여승’으로 유명했던 일엽 스님이 수행한 최초의 비구니선원인 ‘견성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덕사 대웅전 삼세불> 사진 제공 나들e

 

문화답사를 나섰던 6월 16일은 하루 종일 안개가 끼어 전경이 다소 희미하게 보였지만 깊은 산 중의 고색창연한 수덕사가 풍기는 오묘한 분위기로 천 년 고찰이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수덕사로 올라가는 길에있는 ‘수덕여관’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가집 여관으로 이응로 선생 사적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친구인 일엽 스님을 따라 불교에 심취해 묵었던 곳이다. 이응로 선생은 1968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수상하여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필묵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시도와 시대정신에 투철한 작품으로 그가 주로 활동한 프랑스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베를린공작단사건’,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 나혜석을 존경하여 미리 사두었던 수덕여관에서 이미 이혼한 전처의 수발을 받으며 앞마당 바위 두 개에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는 한글 자모들이 풀어져 서로 엉키면서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문자추상이다.




<이응로 화백의 문자추상 암각화> 사진 제공 나들e

 

안개에 싸여 그 신비로움을 더하는 수덕사를 뒤로 하고 일행이 향한 곳은 윤봉길 의사 사적지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독립투사 윤봉길의 사적지에는 생가 및 생장가, 부흥원, 충의사 및 윤봉길의사기념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있으며 1965년에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기리며 세운 기념탑과 1968년에 세운 사당 ‘충의사’가 있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으며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자활 농촌진흥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해 활동하던 중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만주로 망명한다. 1931년 상해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의 뜻을 밝힌 후 1932년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개최한 일제의 천장절 겸 전승기념 축하식장을 폭파했다. 거사에 성공한 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9일 일본 금택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25세 일기로 순국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은 전통문화지도사들은 총살에 쓰인 나무형틀을 보고 가슴아파하기도 했다. 일제가 암매장한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발굴한 현장에서 나온 나무기둥은 윤봉길의사의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린 상태로 묶었던 것으로 김구 선생이 윤의사의 유해와 함께 송환했다. 김구 선생의 묘소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삼의사묘소가 있으며 양재시민의 숲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매헌기념관’이 있다.

 


<윤봉길의사 생가의 윤봉길 의사 동상> 사진 제공 나들e

 

충청남도 예산 가야산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무덤도 있다. 남연군 이구의 무덤이 있는 지역은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곳’이라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즉 장헌세자의 서자 은신군은 숙종의 여섯 째 아들 연령군의 손자로 입양되었는데 은신군이 후사가 없어 남연군이 그의 양자가 되었다.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1868년 독일의 상인 오페르크 등의 도굴 시도로 외교문제가 되기도 했으며 이 사건으로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에 더욱 배타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당시 서양 문화의 상징이었던 천주교에 대해서도 강력한 탄압 정책을 펼치는 등 천주교 박해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1840년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고 전해진다. 도굴을 염려한 흥선대원군은 관을 넣은 후 철과 석회를 부어 단단하게 한 뒤 봉분을 조성했다. 묘비의 글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필이다.

 



<남연군 이구의 무덤> 사진 제공 나들e

 

마침내 새벽부터 내리는 안개비와 함께 안개로 뿌옇던 하늘도 맑게 개였다. 눈부신 햇살 아래 일행이 찾은 곳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옛 집이다. 

추사고택은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서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본래 53칸의 저택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20여 칸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작은 마을처럼 가지런하게 정돈된 한옥들이 인상적이었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사랑채는 동쪽에 따로 있다. 모란이 가득한 화단이 있는 사랑채 마당에는 추사가 직접 제작한 해시계도 서있다. 안채 뒤 후원 쪽 가장 높은 곳에는 추사의 영정을 모신 ‘추사영실’이 있는데 현판 글씨는 추사의 오랜 벗인 이재 권돈인이 썼다. 

대대로 물을 길던 석정을 지나면 부부합장묘인 추사 김정희의 묘가 있다. 

이외에도 추사 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과 그 부인인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합장묘와 화순옹주 열녀문인 홍문이 있다. 그리고 추사가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앞에 심은 백송도 볼 수 있었다.

이조참판을 역임한 추사는 금석학과 고증학을 깊이 연구하고 실학사상을 정리하여 개화사상으로 연결하는 한편 서예에도 뛰어나 추사체를 이루었고 묵화에도 조예가 깊어 ‘완당세한도’와 같은 걸작을 많이 남겼다.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하고 1816년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 때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헌종 때 9년간의 제주도 유배, 철종 때 북청 귀양 등 어려움도 겪었으나 실사구시를 주장하고 불교, 천도교 등 종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추사 김정희 고택> 사진 제공 나들e



<추사 김정희가 직접 제작한 해시계로 위에 있는 구멍에 나무를 꽂아 그림자를 재서 시간을 측정했다.> 사진 제공 나들e

 

버스에 오르기 직전에 들른 마지막 답사지 ‘화순옹주 정려’에서 국립민속박물관 전통문화지도사 일행은 옹주부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와의 말다툼 끝에 이마에 벼루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낙심한 화순옹주는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 단식하여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남편에 대한 화순옹주의 정절을 칭찬하였지만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다. 훗날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자신이 왕이 되기 전 살았던 집(현 경복궁역 2번 출구 인근) 바로 앞에 월성위궁을 지어줄 정도로 생전에 가장 아꼈던 고모 화순옹주를 위해 200여 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화순옹주홍문’을 세웠다고 한다. 건물은 오래전에 불에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었다.

 

빠듯한 일정을 마치고 국립민속박물관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일곱 시가 채 안된 시간이었다. 수덕사 앞에서 산채정식으로 맛있는 점심도 함께 한 이날의 예산 문화답사는 여러모로 사람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김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