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봄, 스무 살 청년의 설레는 발걸음으로 마주했던 장곡리의 풍경을 일흔다섯의 나이에 다시 그려본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나 생명력 넘치게 자라난 그 시절 아이들을 만났던 시간은, 찬란하면서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소금꽃 피던 염전과 바람아래의 푸른 꿈
1970년 3월, 고남면 장곡리에 첫 발령을 받았다.
그 시절에는 대천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이곳에 닿을 수 있었다. 지금은 차를 몰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해저터널을 지나 원산도를 거쳐 다리를 건너면 안면도에 닿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몇 번의 뱃길과 긴 걸음을 거쳐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대천에서 배를 타고 영목항에 내린 뒤, 나머지 길은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짐을 짊어지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제법 먼 흙길을 걷던 그 시간은, 지금 돌아보면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도착한 고남초등학교 장곡분교장은 내 인생의 가장 눈부신 시작이었다. 1968년에 문을 연 이 작은 학교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진 별천지였다.
격동의 시절을 지나 교단에 서다
나는 1968년 교대에 입학했다. 그해는 나라 안팎으로 긴장이 높던 시기였다. 사회 전체에 흐르던 묵직한 공기는 교실 밖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해 겨울,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배우며 외웠다. 그 문장들은 단순한 글귀가 아니라, 그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던 정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2년 뒤, 나는 교단에 서서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교 마당 끝, 작은 사택에서의 시간
부임과 동시에 머문 곳은 학교 마당 한편의 작은 사택이었다. 방 한 칸과 부엌 하나가 전부였던 그곳이 스무 살 교사의 첫 보금자리였다. 전기가 없어 밤이면 호롱불 아래에서 아이들의 공책을 채점하고,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어느 날은 학부모들이 “선생님 고생하신다”며 갯벌에서 잡은 낙지나 바지락을 문 앞에 두고 가곤 했다. 그 따뜻한 마음 덕분에 외딴 마을의 밤도 외롭지 않았다.
저녁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랫가락이 염전 위를 스치는 바람과 함께 마을 곳곳으로 잔잔히 번져가던 시절이었다.
처음 맡았던 아이들, 그리고 교실
내가 처음 맡은 반은 3학년이었다. 1961년생, 소띠 아이들이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매일같이 외웠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이들은 또박또박 따라 읽었고, 나는 그 문장을 가르치며 교사로서의 책임과 시대의 무게를 함께 느끼고 있었다.
하얗게 피어나던 소금꽃
사택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 바둑판처럼 이어진 염전 위로 햇빛이 내려앉으면, 하얀 소금꽃이 반짝이며 피어났다.
짭조름한 바람이 교정까지 스며들고, 아이들의 머리칼 위에도 바다 냄새가 내려앉았다. 염전둑을 따라 등교하던 아이들의 검게 그을린 다리는 그 무엇보다 건강하고 씩씩했다.
그 소금꽃처럼, 아이들의 시간도 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 염전은 문을 닫고 한동안 폐염전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태양광 발전소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 하얀 소금꽃이 피어나던 자리에 이제는 햇빛을 모으는 검은 패널들이 놓여 있다고 한다. 뜨거운 안면도의 햇살이 이제는 전기가 되고, 조용한 농촌 마을의 새로운 소득원이 되었다니 그 또한 반가운 변화다.
소금꽃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형태의 ‘빛’이 피어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로 가득했던 교정
그 시절, 학교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전쟁 이후 태어난 아이들이 교정을 가득 채워 전교생이 80여 명에 달했다. 좁은 교실에서 “가나다라”를 외치던 목소리는 마당을 넘어 염전까지 울려 퍼졌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를 주머니에 넣고 공기놀이를 하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번져갔다.
바람아래에서 품었던 꿈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과 함께 바람아래해수욕장으로 향하곤 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모래 위를 걷던 그 시간은, 교실 밖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이들이 언젠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날의 약속들은 파도에 실려 수평선 너머로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 남은 자리
세월이 흘러 나는 어느덧 일흔다섯이 되었다. 아이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고, 교정의 소리도 점차 사라졌다.
장곡분교는 1995년 3월 1일, 전교생 여섯 명을 마지막으로 고남초등학교로 통합되며 문을 닫았다. 긴 시간 이어져 온 학교의 숨결이 멈추던 날, 내 마음 한편도 조용히 내려앉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다목적회관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고 한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남겨진 시간, 이어지는 기억
이제는 모두 환갑을 넘겼을 나의 제자들아. 우리가 함께했던 교실과 사택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의 시간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또렷하다.
어디선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오던 밤, 나는 호롱불 아래에서 아이들의 공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 노랫가락은 그 시절의 공기와 함께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소금꽃 피던 염전의 빛과 바람아래 바다는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듯하다. 너희와 함께 꿈을 꾸던 나의 스무 살도 그곳에 머물러, 여전히 너희를 응원하고 있다.
너희의 삶 또한 그날의 소금꽃처럼 단단하고, 오래도록 빛나기를 바란다.
이 시절을 추억하면서 노래를 만들고 동영상을 만들었다.
소금꽃 피던 교정
대천에서 배를 타고
바람 따라 걸어와
작은 분교 교정 위에
스무 살을 두었지
소금꽃 피던 그 염전
햇살이 눈부시던 날
지금은 빛이 되어
농촌을 살리려나
내 마음은 아직도
그 교정에 남아서
그날들을 되새기며
조용히 서 있다
바람아래 해수욕장
파도 소리 들으며
아이들과 걷던 길이
아직도 남아 있네
호롱불 켜진 밤이면
공책을 넘기며
먼 곳에서 들려오던 파도 소리
바람에 실려 왔지
어디선가 동백아가씨
그 밤을 닮아 울고
나의 스무 살은 지금도
그곳에 머문다

용기백배 한걸음
1970년 봄, 스무 살 청년의 설레는 발걸음으로 마주했던 장곡리의 풍경을 일흔다섯의 나이에 다시 그려본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나 생명력 넘치게 자라난 그 시절 아이들을 만났던 시간은, 찬란하면서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소금꽃 피던 염전과 바람아래의 푸른 꿈
1970년 3월, 고남면 장곡리에 첫 발령을 받았다.
그 시절에는 대천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이곳에 닿을 수 있었다. 지금은 차를 몰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해저터널을 지나 원산도를 거쳐 다리를 건너면 안면도에 닿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몇 번의 뱃길과 긴 걸음을 거쳐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대천에서 배를 타고 영목항에 내린 뒤, 나머지 길은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짐을 짊어지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제법 먼 흙길을 걷던 그 시간은, 지금 돌아보면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도착한 고남초등학교 장곡분교장은 내 인생의 가장 눈부신 시작이었다. 1968년에 문을 연 이 작은 학교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진 별천지였다.
격동의 시절을 지나 교단에 서다
나는 1968년 교대에 입학했다. 그해는 나라 안팎으로 긴장이 높던 시기였다. 사회 전체에 흐르던 묵직한 공기는 교실 밖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해 겨울,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배우며 외웠다. 그 문장들은 단순한 글귀가 아니라, 그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던 정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2년 뒤, 나는 교단에 서서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교 마당 끝, 작은 사택에서의 시간
부임과 동시에 머문 곳은 학교 마당 한편의 작은 사택이었다. 방 한 칸과 부엌 하나가 전부였던 그곳이 스무 살 교사의 첫 보금자리였다. 전기가 없어 밤이면 호롱불 아래에서 아이들의 공책을 채점하고,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어느 날은 학부모들이 “선생님 고생하신다”며 갯벌에서 잡은 낙지나 바지락을 문 앞에 두고 가곤 했다. 그 따뜻한 마음 덕분에 외딴 마을의 밤도 외롭지 않았다.
저녁이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랫가락이 염전 위를 스치는 바람과 함께 마을 곳곳으로 잔잔히 번져가던 시절이었다.
처음 맡았던 아이들, 그리고 교실
내가 처음 맡은 반은 3학년이었다. 1961년생, 소띠 아이들이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맑은 눈을 가진 아이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매일같이 외웠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이들은 또박또박 따라 읽었고, 나는 그 문장을 가르치며 교사로서의 책임과 시대의 무게를 함께 느끼고 있었다.
하얗게 피어나던 소금꽃
사택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 바둑판처럼 이어진 염전 위로 햇빛이 내려앉으면, 하얀 소금꽃이 반짝이며 피어났다.
짭조름한 바람이 교정까지 스며들고, 아이들의 머리칼 위에도 바다 냄새가 내려앉았다. 염전둑을 따라 등교하던 아이들의 검게 그을린 다리는 그 무엇보다 건강하고 씩씩했다.
그 소금꽃처럼, 아이들의 시간도 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 염전은 문을 닫고 한동안 폐염전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태양광 발전소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 하얀 소금꽃이 피어나던 자리에 이제는 햇빛을 모으는 검은 패널들이 놓여 있다고 한다. 뜨거운 안면도의 햇살이 이제는 전기가 되고, 조용한 농촌 마을의 새로운 소득원이 되었다니 그 또한 반가운 변화다.
소금꽃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형태의 ‘빛’이 피어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로 가득했던 교정
그 시절, 학교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전쟁 이후 태어난 아이들이 교정을 가득 채워 전교생이 80여 명에 달했다. 좁은 교실에서 “가나다라”를 외치던 목소리는 마당을 넘어 염전까지 울려 퍼졌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조개껍데기를 주머니에 넣고 공기놀이를 하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번져갔다.
바람아래에서 품었던 꿈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과 함께 바람아래해수욕장으로 향하곤 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모래 위를 걷던 그 시간은, 교실 밖 또 하나의 배움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이들이 언젠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날의 약속들은 파도에 실려 수평선 너머로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 남은 자리
세월이 흘러 나는 어느덧 일흔다섯이 되었다. 아이들은 하나둘 마을을 떠났고, 교정의 소리도 점차 사라졌다.
장곡분교는 1995년 3월 1일, 전교생 여섯 명을 마지막으로 고남초등학교로 통합되며 문을 닫았다. 긴 시간 이어져 온 학교의 숨결이 멈추던 날, 내 마음 한편도 조용히 내려앉았다.
지금 그 자리에는 다목적회관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고 한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남겨진 시간, 이어지는 기억
이제는 모두 환갑을 넘겼을 나의 제자들아. 우리가 함께했던 교실과 사택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의 시간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또렷하다.
어디선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오던 밤, 나는 호롱불 아래에서 아이들의 공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 노랫가락은 그 시절의 공기와 함께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소금꽃 피던 염전의 빛과 바람아래 바다는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듯하다. 너희와 함께 꿈을 꾸던 나의 스무 살도 그곳에 머물러, 여전히 너희를 응원하고 있다.
너희의 삶 또한 그날의 소금꽃처럼 단단하고, 오래도록 빛나기를 바란다.
이 시절을 추억하면서 노래를 만들고 동영상을 만들었다.
소금꽃 피던 교정
대천에서 배를 타고
바람 따라 걸어와
작은 분교 교정 위에
스무 살을 두었지
소금꽃 피던 그 염전
햇살이 눈부시던 날
지금은 빛이 되어
농촌을 살리려나
내 마음은 아직도
그 교정에 남아서
그날들을 되새기며
조용히 서 있다
바람아래 해수욕장
파도 소리 들으며
아이들과 걷던 길이
아직도 남아 있네
호롱불 켜진 밤이면
공책을 넘기며
먼 곳에서 들려오던 파도 소리
바람에 실려 왔지
어디선가 동백아가씨
그 밤을 닮아 울고
나의 스무 살은 지금도
그곳에 머문다
용기백배 한걸음